* 본 연재는 출판사 아르테의 협찬으로 진행됩니다.
계단의 하나코 - 프롤로그
계단의 하나코 - 1
계단의 하나코 - 2
오전부터 매미 소리가 요란스러운 여름날이다. 아이카와 히데키는 당직 때문에 혼자 교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때 후배인 고타니 지사코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그 학교에서 교생을 했던 고타니라고 합니다.”
“지사코?”
“어머? 이 목소리는 혹시 아이카와 선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갑자기 마음이 놓여 긴장이 풀린 것 같다. 지사코는 두 달 전인 6월에 와카쿠사미나미 초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마친 대학생이다.
“어, 그래. 어쩐 일이야?”
“아, 다행이다. 오늘 당직이 아이카와 선배구나. 교감 선생님이면 어쩌나 했어요.”
근엄한 교감 얘기를 꺼내며 쾌활한 목소리로 웃는다. 아이카와 히데키와 고타니 지사코는 열 살 정도 차이가 나지만 같은 대학 연극 동아리의 선후배 사이다. 아이카와는 졸업한 선배로 지금도 연극반에 가끔 얼굴을 비춘다. 봄 학기 교생실습에서 고타니 지사코가 자기 반에 배정되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교생은 대개 한 반에 한 명으로, 고타니 지사코와 아이카와는 한 달 동안 함께 일했다.
아이들과 다른 동료 교사들 앞에서는 깍듯하게 ‘아이카와 선생님’, ‘고타니 선생’이라고 제대로 호칭을 썼지만 둘만 있을 때는 문득 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지금 학교에 가도 될까요? 실은 실습 끝난 후에 깜빡 잊고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 바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통 시간이 나질 않았거든요. 오늘 근처에 볼일이 있는데, 학교 안으로 들어가도 돼요?”
“와. 지금 나 혼자인데 마침 잘됐네.”
피우던 담배를 빈 캔의 테두리에 끄면서 말했다. ‘금연인 교무실에서 서슴지 않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때는 여름방학뿐 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여름방학 동안 교대로 당직을 서야 하니 거의 매일 누군가는 교무실을 지킨다. 보통은 두 사람씩 당직을 서지만 오늘은 우연찮게 같이 당직을 서야 할 담당 교사가 감기 때문에 결근했다. “오늘 쉬어도 될까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건 동료 교사 다카나시에게 혼자서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늘은 도서관, 수영장 모두 개방하지 않는 날이니 할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혼자 있으면 담배를 피워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좋다.
“정말 고마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제가 뭐라도 사가지고 갈게요.”
“필요한 거 없어. 괜히 신경 안 써도 돼.”
“또 그렇게 말씀하신다. 제가 지금까지 선배한테 얼마나 많이 얻어먹었는데요. 저도 한 번은 사야지요.”
남의 배려를 받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더 편한 사람도 있다. 아이카와는 자신이 그런 유형이라고 생각했다. 올해로 서른하나. 동년배 여교사들한테 1등 신랑감 소리를 들었고, 똑같은 처지의 후배들에게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는 응원의 말도 들었다. 실속도 없는 덕담을 들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쓴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나온다. 화려한 연애를 한 지도 꽤 오래됐다.
“도착하면 전화해. 바로 문 열어줄게.”
“고마워요.”
올해 들어 수상한 사람이 초등학교에 침입한 사건이 많아 설령 수업 중이라 해도 교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여름방학 동 안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학교에 드나들 수 없게 된 점이 안타깝기는 하다.
“모로조프의 치즈 케이크를 사갈게요. 그거 좋아하셨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지사코가 온 건 그 후 1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선배…….”
교무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수업 계획안을 작성하던 아이카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을 드니 문 입구에 지사코가 서 있었다.
“지사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오늘 몇 개비째인지도 모를 담배를 급히 캔 속에 버렸다. 묻기도 전에 지사코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또 깜빡하셨죠? 교감 선생님이 보셨다면 뭐라 하셨을 거예요. 자, 이거 받으세요.”
“어, 정말?”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지사코가 자신의 볼옆으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제가 들어와서 잠갔어요. 선배는 실수를 좀처럼 안 하시는데 신기하네요. 평소엔 꼼꼼하시면서 방학이라 긴장이 풀리셨어요?”
“아니 그게…….”
문을 열쇠로 잠그는 건 습관이 됐지만, 확실히 확인했느냐고 하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하긴 이렇게 더우니 그럴수도 있죠.”
지사코가 흰 폴로셔츠의 가슴 언저리를 과장되게 부채질한다.
“참, 그리고 그 담배.”
“아.”
이런.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못 본 척해줄래? 요즘은 남자 교사들의 흡연율도 많이 줄어들었잖아.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흡연자들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어.”
“피우시는 건 상관없지만 냄새에는 주의하셔야 할 거예요. 담배 냄새는 꽤 오래가잖아요.”
지사코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흰 봉지를 내밀었다.
“치즈 케이크 사왔어요. 차랑 같이 드실래요? 저도 먹고 싶은데.”
“이왕 먹을 거면 차갑게 해서 먹을까?”
봉지에는 모로조프를 상징하는 M 마크가 찍혀 있다.
“그런데 정말 빨리 왔네. 나는 다카시마야 근방일 거라고 생각했지.”
시내에서 모로조프의 케이크를 파는 곳은 번화가의 다카시마야 백화점밖에 모른다. 그곳이라면 여기에서 거리가 꽤 멀 다. 지사코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맞아요. 다카시마야에서 전화를 한 다음에 지하에서 사가지고 왔어요.”
“그래?”
“선배, 더위 때문에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거 아니에요? 아니면 그만큼 집중해서 일하셨어요?”
웃으면서 봉지 안에 있는 상자를 꺼내 들었다. 테이프로 고정시킨 아이스 팩을 떼어낸 후 “아직도 차가운데요.”라며 아이카와에게 보여줬다.
“바로 먹어도 될 거 같아요. 제가 차를 끓일까요?”
아이카와 옆자리에 놓고 열어보라고 재촉했다. 아이카와는 잠시 생각한 다음 “이따가.”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사무 용 책자를 덮고 일어섰다.
“찾는 물건은 어디에 있지?”
“아마, 음악실일 거예요. 음악실 책장 위에다 놓고 왔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지사코가 겸연쩍은 듯이 설명한다.
“제 전공이 음악이라 송별회 때 학생들이 음악실에서 연주회를 열어줬잖아요?”
“아.”
그건 아이들이 계획한 거였다. 수업이 끝난 후 지사코 몰래 합주 연습을 한다기에 아이카와도 몇 번인가 참석한 적이 있 었다.
“그땐 정말 감동했어요. 그런데 뒷정리할 때 그때 받은 편지 하나를 책장 위에 올려놓고…….”
비밀은 지켜주세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정말 생각이 짧았죠. 만약 편지를 준 아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상처를 받을 거예요. 사실은 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나질 않아서.”
“내가 당직이어서 다행이네. 그래, 그럼 나랑 가보자. 한 바퀴 순찰해야 하는데 같이 갈래? 괜찮긴 하겠지만 문이 열려 있었다니 누가 몰래 들어왔나 싶기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선배, 오늘은 왜 혼자세요? 다른 당직 선생님은요?”
“다카나시 선생은 감기래.”
“어머, 다카나시 선생님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다카나시는 교사가 된 지 2년째로,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인다. 사실 지난 6월에는 지사코를 비롯한 교생들과 어울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학창 시절 테니스로 이름을 날렸다는 자랑에 걸맞게 햇볕에 잘 그을린 남자다운 얼굴. “선배, 지사코 선생님은 남자 친구 없어요?” 아이카와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다카나시 선생도 지사코를 만나고 싶어할 텐데. 오늘 온 걸 알면 억울해하겠네.”
“어머, 정말요?”
“실습 끝나고 두 사람, 아무 일도 없었어? 실습 중에는 꽤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다카나시 선생은 착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지사코랑 잘 어울려.”
“음. 약간 고집스러운 면도 있긴 하지요.”
“정의감이 지나치게 강해서 그래. 지사코 너랑 똑같아.”
“그 후로 연락은 주고받았어요. 문자도 자주 하고.”
교감 자리 옆에 있는 열쇠 보관함에서 마스터키를 빼냈다. 방학 동안은 음악실도 잠가두었을 것이다.
“순찰을 같이 가준다니 고맙네. 혼자보다야 둘이 든든하지.”
“저처럼 비실비실한 여자한테 무슨 기대를 하세요?”
볼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아이카와를 가볍게 노려봤다. 그 말처럼 지사코는 키가 작고 말라서 6학년 아이들이랑 나 란히 서 있으면 그 속에 파묻힐 정도다. 고양이 같은 동그란 눈과 활발한 인상의 짧은 머리. 동아리에서도 남자 후배들한테 인기가 많지만 아이카와가 보기엔 솔직히 약간 기가 세다.
지사코는 ‘올곧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완고하리만큼 정의감도 강하다. 몇 년 전 동아리 회원들끼리 연애를 하다 싸 움이 난 적이 있었다. 당시 지사코의 친구가 마음의 상처를 입자 상대방 남자가 수업을 듣는 교실에 지사코가 쳐들어가 남자를 팬 적이 있다고 들었다. 망신을 당한 남자는 얼마 있다가 동아리를 탈퇴했다. 젊은 혈기 때문에 벌어진 비이성적 행동일지도 모른다. 교사가 되어서 사회에 나오면 깨끗하게 세상을 살아가기는 힘들텐데. 아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실비실하다니? 그새 살이 또 빠졌어?”
“사실 조금 빠졌어요.”
지사코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렇군.”
말을 흐리는 모습만으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손으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아이카와가 평소 수업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지휘봉을 장난삼아 잡아당기고 집어넣으면서 옆에 서있는 지사코의 가느다란 허리를 슬쩍 봤다.
비만이라는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익숙해진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아이카와는 올봄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살을 빼라는 의사의 충고를 들어야 했다. 체형까지 그렇다 보니 ‘좋은 사람’이라는 자신의 캐릭터가 훨씬 강조되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키가 커서 살이 쪘다기보다는 덩치가 크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지사코는 대학 동아리에서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무대 위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반대로 아이카와는 4년 내내 무대 뒤에서 활동했다. 화려한 주인공 역할을 해보고 싶었지만 되지도 않는 희망사항을 말해 주변 사람들한테 분수를 모른다는 말을 듣기는 싫었다. 남들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남들한테 동정받기보다는 포기하는 게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놓인 모로조프의 상자를 보고 제안했다.
“순찰을 다 돌고 나면 먹자. 냉장고에 넣어둘래?”
“알겠어요.”
노골적으로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사코는 교무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음악실에 둔 편지가 없어졌다면 큰일인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말을 던졌다.
“벌써 학생들이 발견해서 교생 선생님한테 실망했다는 소문이 돌았을지도 모르지.”
“꺅! 그럼 안 돼요.”
얼굴을 일그러뜨린 지사코가 쾅 소리를 내며 냉장고 문을 닫더니 아이카와를 흘겨봤다.
“농담이야, 미안.”
웃으면서 마스터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지사코와 함께 복도로 나갔다.
(계속) 계단의 하나코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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