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두리 없는 거울> 계단의 하나코 - 5

* 본 연재는 출판사 아르테의 협찬으로 진행됩니다.

계단의 하나코 - 프롤로그
계단의 하나코 - 1
계단의 하나코 - 2
계단의 하나코 - 3
계단의 하나코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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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지금 고타니 지사코와 아이카와 두 사람뿐이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만지고 나서야 땀으로 범벅이 됐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몸은 뜨거운데 등줄기는 서늘하다 못해 오한이 느껴졌다. 부쩍 말수가 적어진 아이카와 앞에서 지사코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서늘해보이는 등과 그 등에서 뻗어 나온 흰 손발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를 아득함이 엄습했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오늘 당직을 선 사람은 아이카와 혼자다. 내일 다른 사람이 출근하기 전까지 여기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이곳은 완전한 밀실이다. 학교 건물은 교정과 뒤뜰에 둘러싸여 있다. 학교 밖은 논밭과 공원이다. 민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학교 안에서 어지간히 큰 소리가 나지 않는 한 달려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지사코는 오늘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요.”

뚫어지게 바라보던 새하얀 등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몸이 굳고 입술이 꾹 닫힌 아이카와에게서 “……어.”라는 대답이 겨우 나왔다. 지사코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층계참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소리만이 머리 위에서 들릴 뿐이었다. 발밑에는 갈색으로 보이는 젖은 실내화 자국. 단순한 얼룩이라 생각하고 발을 내딛었더니 물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사유리는 어쩌면 그날 학교에 왔던 게 아닐까요?”

아이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사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솟구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그냥 제 느낌이에요. 휴일이었지만 누군가와 약속을 했을수도 있잖아요. 사유리의 엄마가 위조를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사유리가 거짓말을 썼을 것 같지도 않고요.”

지사코는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 발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발소리는 멀어져갔지만 들려오는 지사코의 목소리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불러냈을 수도 있죠. 그런데 누굴까요? 그 아이는 친구도 많지 않았는데……. 사유리는 외로웠던 거예요. 만약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고민을 받아주는 사람이 생겼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 거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듣지 않았을까요?”
“고민을 상담했다면, 그럴 만한 사람은 너 아니면 다카나시 선생이지 않겠어? 그런 기억은 없니?”

그 말을 하며 ‘그래, 다카나시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까 지사코가 말했던 담뱃불 자국을 다카나시도 봤다. 지사코의 입을 막는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죠.”

그 목소리는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아이카와의 의식을 움켜잡았다. 말문이 턱 막혔다.

“그 글은 사유리 엄마 말대로 사유리가 보낸 SOS 신호예요. 무의식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건 아닐까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사유리가 죽은 곳은 사체가 발견된 장소인 산속 다리가 아니라 이 학교가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말도 안 돼!”

거의 울부짖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렸고 말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지사코, 아까부터 정신없게 얘기를 해대는 통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하나코 이야기와 사유리의 사고가 무슨 상관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루미놀 반응……이라고 하나요? 어떻게 하면 경찰이 조사할까요? 뭐라도 증거를 보여줘야 바로 조사할 것 같은데.”
지사코가 미소를 지었다. 아이카와는 깜짝 놀랐다.

“사유리는 발견된 장소에서 죽지 않았어요. 다리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위에 부딪힌 게 아니라고요. 예를 들면 이 학교 건물만 해도 떨어지면 목숨을 잃을 만한 장소가 있어요. 이 계단에서 떨어졌다면…….”

쿵.

지금까지 위로만 올라갔던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한 계단을 내려왔다.

“저…….”

지사코가 손가락으로 계단 아래쪽 층계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층계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면…… 그 상처가 그때 생긴 것이라면…… 사유리가 세게 부딪혔다면…….”
“지사코.”

검붉은 피가 마치 의사능력을 가진 생물처럼, 조막만 한 머리를 기점으로 솟구쳐 흘러나온다. 계단에 대놓은 미끄럼 방지용 고무. 그곳까지 흘러가서 고인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따라 묵직하게 흘러간다.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슬로모션처럼. 그 광경이 지금 눈앞에 있는 깨끗한 크림색의 층계참 바닥과 겹쳐졌다. 의미심장한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하지만 다음 말은 한참 후에 나왔다.

“사유리는 여기서 살해당한 거예요.”

지사코가 말했다.

“그리고 그 다리로 옮겨졌어요.”
“마치 네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봤지요, 여기서 모든 걸.”

그 말을 하며 지사코는 아이카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손을 힘없이 축 늘어뜨린 서글픈 모습. 목구멍 깊은 곳까지 위축된 아이카와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웅…… 웅…… 웅…… 뭔가에 짓눌린 낮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진동. 당황해하며 진동으로 설정해놓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 표시가 뜬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순간 아이카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지 못한 건,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만 크게 벌리고 숨을 멈추었다.

‘고타니 지사코.’

연신 울려대는 휴대폰 화면에 그 이름이 있다. 웅…… 웅…… 웅…… 낮은 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조명. 착신을 알리는 빨간 램프의 점멸. 긴장된 손은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에요?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앞의 현실로 돌아왔다. 올려다본 층계참에 지사코가 서 있었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몸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햇빛을 받은 얼굴이 마치 거기만 살아 있는 듯 하얗게 떠올랐다. 커다랗고 검은 눈이 깜빡이지도 않고 아이카와를 내려다본다.

“무슨 일이에요? 전화라도 왔어요?”
‘고타니 지사코.’

햇살 속 뽀얀 먼지가 춤추는 공기 속으로 그 이름이 흩날린다. 진동은 계속 이어졌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다.

“지사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휴대폰은……?”
“아아.”

꿈속에 있는 것처럼 지사코가 멍한 소리를 냈다. 자신의 왼손과 오른손을 우아한 손짓으로 펼쳐 보이더니 비어 있는 손을 응시하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집에 놓고 왔나 봐요.”
“학교에는 어떻게 전화를 걸었어?”
“아아.”

조금 전과 똑같이 말하고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전화로 걸었죠.”

아이카와의 전화기가 진동을 멈추자 시야에서 ‘고타니 지사코’의 이름이 사라졌다. 층계참에 있는 지사코가 깔깔거리면서 몸을 조용하게 빙그르르 돌렸다.

“휴대폰을 놓고 왔어요.”

얇은 셔츠 한 장과 짧은 바지. 주머니가 불룩한지 알 수가 없다. 불룩한 것 같기도 하다. 저주파처럼 끼익 하는 소리, 전기가 지나는 소리, 매미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그게 이명인지 정말로 매미 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교문은 분명히 잠갔다. 생각났다. 이제야 분명히 생각났다. 오늘 학교에 오자마자 틀림없이 안에서 문을 잠갔다. 지사코가 학교에 왔을 때만 열려 있었을 리가 없다.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오늘 당직을 선 자신뿐이다. 모로조프의 치즈 케이크가 든 하얀 상자. 전화가 걸려온 후 학교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 다카시마야에서 여기까지의 거리.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하얀 상자. 아이스 팩을 떼어내고 아이카와에게 말했다.

먹어요, 지금 당장.

차가워지면 먹자고 했더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냉장고에 넣었다. 하나코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 하나코가……. 뜬금없이 머릿속에서 문장 하나가 번쩍 튀어나왔다.

하나코가 상자를 줘도 받으면 안 된다.

“선배, 왜 그래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꿰뚫어보듯이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지사코 앞에서 아이카와는 결박당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음악실에 가볼까요?”

1층으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올라온 계단을 뒤돌아본 아이카와를 지사코가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내가 준 사탕!”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창자 깊숙한 곳에서 분출되는 목소리다. 조용하지만 분노로 떨리는 위압적인 목소리. 날카롭게 날아서 자유를 낚아챈다.

“먹었어요?”

억양이 없는 목소리. 경멸이 섞인 냉정한 눈빛으로 지사코가 말했다. 맴맴맴맴맴. 매미 소리만 끊임없이 들린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탕.
사탕 드실래요?
고마워.

대답한 기억이 났다. 입이 바짝 말랐다. 건조한 볼 안쪽. 그 곳이 달달한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한 동시에 식은땀이 온몸에 솟구쳤다. 알 수가 없다. 생각이 안 난다. 자신이 그 사탕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나코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다.

‘1층 계단까지 내려가도.’

쿵.

지사코가 한 걸음 내려왔다.

‘다시 3층으로 돌아간다. 계단에 갇힌다. 하나코의 저주는 바로 무한 계단이라는 벌이다.’

“사탕, 먹었어요?”

다시 물어본다.

“맛있어요?”
“아직.”

문득 기억이 나 경련을 일으키듯 등을 폈다. 그리고 가슴팍의 주머니를 두드렸다. 마음이 놓이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딱딱하고 약간 불룩한 감각이 확실히 손끝에 와 닿았다. 날숨과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안 먹었어.”

지사코가 조용히 얼굴을 찡그렸다. 지루하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아이카와를 바라보며 “그래요?”라고 말했다.

“다행이네요.”
“계단…….”
“네?”
“이렇게 어두웠나?”

창으로는 분명히 낮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밝음의 질이 아까와는 다르다. 시야가 어둡게 느껴졌다.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하지만 문득 불길한 단어가 생각났다. 땅거미가 질 때. 가요, 하고 지사코가 말했다.

“끝까지 같이 가주세요. 음악실에 물건을 놓고 왔잖아요.”

발끝을 빙그르르 돌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아이카와는 가슴팍의 주머니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의 떨림을 더 이상 멈출 수가 없다. 심장 위에 놓인 사탕의 감촉.

하나코는…….
하나코는 학교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안다.
……봤지요, 여기서 모든 걸.

침을 꿀꺽 삼키자 그 감각이 무겁게 느껴졌다. 땀이 비 오듯 내린다. 당장 돌아가고 싶은데 눈앞에 있는 ‘지사코’의 등이 허락하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발신자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타니 지사코.’

상대는 받지 않는다. 냉정해지자. 자신을 도닥였다. 손에 꽉 쥔 지휘봉은 땀범벅이 되어 미끌미끌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지사코의 휴대폰.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부탁했거나…….

“왜 그러세요?”

지사코가 계단 위에서 부른다. 무섭고 냉정한 눈이 아이카와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 여기 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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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미선

    뭔가..어릴때 보던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이번 5편은 보는내내 소름이 돋네요...
    결말이 정말 궁금해지고있어요...미스테리하면서도 잔잔한 공포심도 생기고요...하나코가 사유리의 복수를 대신 해주나요??흠..여튼 너무 흥미진진합니다...개인적으로 일본 공포는 많이 접해보지 않았는데 이글로 인해서 생각이 바뀔거 같네요
  2. 비밀방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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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AN

    우와..진짜 놀랍네요..
    저번편에서 지사코가 사유리한테 혼난단 말을 들었다는거 듣고 뭔가..계단에서 만난 아이..일수도?라는생각했는데...그게 맞았네요..
    오늘편을 보고 치즈케잌의 대한것도 해결되고..
  4. ㅇㅇ

    어디까지 남았나요 두근두근 재미있어요 ㅎㅎ
  5. 이지훈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이 일단 흥미를 유발시킵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장소일 수는 있겠지만
    등장인물간의 감정표현이 세밀해서 더욱 더 소설에 몰입할 수 있게끔 해주네요.
    힐 하우스의 유령 등 공포소설 좋아하는데 일본공포소설은 처음이네요 기대가 많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