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1시 11분의 전화 (Part. 2)

본 소설은 향수님께서 잠밤기에 올려진 괴담을 소재로 쓰신 것입니다.
향수님의 허락 하에 잠밤기에 연재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전화가 걸려온 지 세 달 무렵 지났을 때에는 공포심마저 무뎌져 있었다. 그것은 강도가 변하지 않는 공포에 대한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여자친구와의 불화가 더 큰 이유였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내 처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 주고 있었고, 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 전화가 와도, 그녀는 웃으며 받으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가 곁에 있어 준 덕에 괜스레 용기가 솟아난 나는, 휴대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거나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여자친구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휴대폰을 방에 두고 편의점에 간 동안에 전화가 걸려왔던 모양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전화를 받았을 터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집에 돌아오던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여자친구와 마주쳤다. 그녀는 몹시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순간적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절벽에서 붙잡기라도 한 듯, 오른팔에 강한 하중이 실렸다. 바닥에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극히 당연한 내 질문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혼란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무슨 일이냐고? 너 진짜 웃긴다? 나 갖고 놀면서 이때까지 재밌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아까 전화 받았어. 울기만 했다고? 웃기고 있네. 그년이 너랑 사귄 지 세 달 됐다 그러더라?"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한 마디 없던 수화기 너머의 그 여자가 대답했다니. 게다가 그 내용이란, 도대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잠시만, 일단 진정해 봐."
"진정은 무슨 진정이야!"

여자친구가 바락 소리를 지르며 내 손을 뿌리친 덕에, 그녀를 위해서 사 온 만 원 어치의 과자와 음료수들이 몽땅 쏟아졌다. 이쯤 되자 나도 화가 치밀었다.

'혼란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내 말은 안 들어 주는 거야?'

그 다음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치 세상이 시간의 속도를 잃은 것처럼, 내 주먹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가 움찔 하며 계단 쪽으로 뒷걸음친 순간, 그녀가 신고 있던 7센티 하이힐의 오른쪽 굽이 부러졌다. 동공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였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에게 닿지 않는 손을 뻗은 채,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은 여자친구는 이미 나를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문병을 갔을 때, 그녀는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왔어?"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진짜 오해야. 난-"
"듣고 싶지 않아. 가."
"아니, 들어. 들어줘."
"가라니까!!!"

그녀는 갑자기 과도를 집어 들고 자기 목에 들이댔다. 뻔한 협박이었지만,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부터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면회를 모두 거절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가 매일 밤 11시 11분에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스토커의 통화를 피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여자친구와 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끊어버렸다- 마치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나는 나대로 계속 전화를 걸었다- 마치 그 스토커처럼. 며칠이 지나고 그녀가 착신을 거부하자, 이제 나는 11시 11분마다 공중전화로 뛰쳐나갔다. 그야말로 발악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모든 공중전화를 전전하고, 하나 남은 마지막 부스에서 여자친구와 겨우 통화한 것은 사고 이후 보름이 지나서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웬일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너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제발 좀 들어줘. 넌 지금 오해하고 있어."
"아니, 오해 같은 건 없어."

멋대로 단정짓는 태도에 또 화가 나려는 나 자신을 가까스로 타이르는데, 그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날 두고 바람을 폈다거나 해서 화가 난 것만은 아냐. 물론 화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지만…"

순간, 수화기 너머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 그 날 사고 때문에 유산했어."

울음기는커녕 한 조각의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비로소 그 말을 이해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나는 그녀에게 따지다시피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였어?!"
"…10주 정도 됐었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당장 결혼하자고 하면 네가 곤란할 것 같아서, 좀 기다려 보려고 했어."

결국 그녀는 또 마음대로 단정을 지어버렸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결혼 요청은 절대 곤란할 리가 없었다. 뒤엉킨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 때문인지 울지는 않았다.

"…미안. 진짜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 줘."
"아니, 용서 안 해줄 거야. 평생 널 증오하면서 살아갈 거야. 설령 너에 대한 사랑이 식는다 해도, 내 뱃속의 아기는 소중했어. 그 애는 한때나마 너와 내가 사랑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그 애는 자기 아빠 때문에 죽었고, 이제 너랑 날 이어줄 건 아무 것도 없어- 이 핸드폰 번호 빼고. 뭐, 상관없어. 곧 바꿀 거거든. 난 너처럼 무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잘 있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반환구로 쏟아져 나오는 동전을 가져갈 생각도 없이, 나는 도망치듯 공중전화부스를 빠져나왔다.
  1. 날아라

    글 보다가 1등 ㅋㅋㅋㅋㅋ
  2. d

    아 잘읽고갑니다
  3. 으헝

    파트 3도 나오는거겠죠..?
  4. ㄷㄷ

    순위권 안이네요
  5. 시즈ㅇㅁㅇ♡

    간만에 왔는데!!
    파트 3도 있는 거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6. 마다다

    잘 보고 갑니다 !!
  7. ReKHaN+

    굉장히 스포일러같은 이야기지만 설마 이게 고리가 되어서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닌지ㅠㅠㅠ
    아님 남자한테 차인 그 스토커 같은 여자가 일부러 헤어지라고???
    궁금해라아.....
  8. 닭콩

    ...어.. 저도 ReKHaN+님이랑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내가 11시 11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이거 복선인가요? (...아닌가?;)
  9. 으음

    자신이 그 전화들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면서 똑같은 일을 하다니.
  10. 귀보벌무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남자한테 매달리는 여자의 정체는.....
    그냥 스토커라고 보기에는 왜 울었을까; 처음에는;;; 너무 감격해서?
    막 알고보면 주인공 남자의 번호는 유산한 여자친구의 전 남자친구의 번호....
    전화하는 여자는 전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ㅋ
    엉망인데 이거;;;ㅋㅋㅋ
    아 혼자 상상해 본 겁니다! 향수님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11. gks0726

    정말이지 남자는 재수 왕창붙은거고 그 여자스토커는 운 왕창생긴거네;;;ㅋ
  12. 방긋

    드디어 파트 2가 올라왔군녀 !!!!!!!!!!!!! 근데 총 파트가 몇까지 있나요? 흥미진진한 스토리 기대하고있을께용~~~~~
  13. 벌과 나비

    알고보니 전화 했던 여자는 연인을 헤어지게 하는 다크 큐피드였단 소린가..
  14. 영감제로

    그 인간이 좋아하나보네 망할 스토커!~
  15. 루토

    ...우와...... 전 그저 다음편이 기대될뿐입니다....+ㅠ+
  16. 은. 바다

    으헤헷 .ㅇㅠㅇ,너무 너무 재미있군요오오!!!!
  17. 아오우제이

    도대체 그 스토커로 추정되는 사람이 여자친구에게 뭐라 말했길래....
    아.... 점점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ㄷㄷㄷ;;
  18. 왜! 말을 못하냐고!!!

    "당장 결혼하자고 하면 네가 곤란할 것 같아서, 좀 기다려 보려고 했어."

    "…미안. 진짜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 줘." << 이말 대신
    [곤란하긴 왜 곤란해 그말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라고..-_-;
  19. 의문의여자

    훗..
  20. 네꼬히메

    킁..아무리 열이 받아도..주먹이 올라갔다는 건.
    치지도 않았지만 -_- 왜 왜 왜.. 주먹을 올려...
    여친한테 가드올려! 한 마디 정도는 해줘도 됐잖아!!!

    제 남친이 아무리 화가 났데도 주먹으로 저렇게 치려고 했다면
    반드시 복수했을텐데 여자 분 착하네요 ㄱ-;
  21. ....이 이것은

    루프물이 되어가는겁니까...
  22. 엉?

    여자가상넘이네.. 그말한마디에속고 얘기도안들을려다 아기사망루트